하루아침에 인간관계를 싹 정리하고 싶어진 당신에게 - 공덕 정신과
필자 | 마포성모정신건강의학과 서만석 원장
"그냥 연락처를 다 지워버렸어요. 새로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진료실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당황했습니다. 인간관계 전체를 한 번에 정리한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그 사람이 지금 어느 지점에 있기에 그런 결정을 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몇 해가 흐르며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20대, 30대, 직장인이기도 하고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합니다. 공통점은 딱 하나입니다. 지쳤다는 것.
저는 그 선택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가 됩니다.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이 요즘 심심찮게 들립니다. 관계에서 피로감이나 갈등이 쌓이면 해결 대신 단절을 선택하고, 연락처를 지우고, SNS를 탈퇴하고, 새로운 관계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식 진단명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현상이 진료실 밖에서도 하나의 언어로 통용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좋았던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거워지고,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연락이 오면 답하기가 버겁고, 결국 슬그머니 거리를 두다가 조용히 관계를 끊는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면서 '이번엔 다를 것 같다'는 기대를 갖는 것.
저는 이 패턴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우선, 이것이 회피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나 불편함을 마주하는 대신, 상황 자체를 초기화함으로써 불쾌한 감각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편도체가 관계의 자극을 위험 신호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뇌는 자연스럽게 회피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 반응이 반복되면 갈수록 관계의 불편함을 버티는 역치가 낮아집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든 관계에서만 리셋을 선택하다가, 나중에는 조금만 어색해도, 조금만 기대에 어긋나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디지털 환경은 관계를 쉽게 맺고 쉽게 끊을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팔로우를 누르는 것만큼 차단도 쉽습니다. 연락처를 저장하는 것만큼 삭제도 쉽습니다. SNS 계정을 만드는 것만큼 탈퇴도 쉽습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환경 자체가 리셋을 권장하는 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성장한 세대에게 리셋 충동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리셋이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관계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지점에서 비슷한 피로가 찾아옵니다. 상대가 달라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패턴은 반복됩니다. 그리고 리셋을 반복할수록 관계를 깊게 이어가는 경험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에, 불편함을 버티는 능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역설적으로, 리셋을 반복하면 할수록 리셋이 더 쉬워지고, 관계는 점점 얕아지고, 고립은 점점 깊어집니다.
이 순환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관계 자체에 대한 기대가 사라집니다. '어차피 친해지면 실망한다', '나는 원래 혼자가 편한 사람이다'라는 결론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결론이 단단해질수록 진료실 문을 여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저는 이런 분들께 한 가지를 여쭤봅니다.
"리셋하기 직전에 어떤 감각이 오나요?"
대부분은 잠깐 생각하다가 비슷한 답을 합니다. 귀찮다, 무섭다, 지친다, 모르겠다. 그 감각의 정체를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관계를 지워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감각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 그것이 치료의 시작입니다.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은 나쁜 성격이나 이기적인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다루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거나, 혹은 너무 많이 다쳐서 회피가 유일한 보호 수단이 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건 의학적으로 접근하고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관계를 지운 후 편안함보다 공허함이 더 크게 남는다면, 그 공허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야기를 나눠보셨으면 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공덕 정신과, 마포성모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의료진이 진심을 다해 함께 고민하겠습니다.